심수구라는 작가가 있다. 현재 경남울산에 거주하면서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그는 일찍이 60년대 후반부터 작품을
발표한 '관록'이 있는 작가이다. 그언데 앞에서 "작가가 있다"라도 표현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의 비평이나 미술저널이 그를 비켜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품활동의 이력이 30여 년을
훨씬 넘긴 중견작가에 대한 화단의 대접치고는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그리고 비평인으로써 나 자신을 돌아볼때
이런 작가를 여태까지 발굴치 못했다는 일말의 자괴감이 앞섬을 금할 수 없다.
심수구에 대한 나 자신의 개인적인 인연은 멀리 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홍대 근처에 지금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한 대학 선배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방 벽 한 편에 대락 10호 크기의 판화작품 한 점이 걸려
있는게 눈에 띄었다. 그것은 흑백의 지그재그식 도형을 한, 간결하면서도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심수구씨 작품이야. 참 푸근한 사람이지." 누구의 작품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대한 선배의
대답이었다.
대략 이런 인연을 지닌 이 작가와의 직접 대면은 이번의 울산 여행을 통해서였다. 그는 울산에 칩거하며 작품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울산에 정착한 것이 만 18년째라고 했다. 개인전 카달로그에 실린
심수구의 경력란으 살펴보면 80년대 이후의 활동이 주로 경남과 부산 지역에 편중돼 있는데, 이는 그의 이런 개인사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70년대에 그는 서울을 중심으로 현대미술 운동에 활발히 참가한 적이 있었고, 이무렵 그는
현대판화 그랑프리전(명동화랑주최, 1973년)에서 동상을, 판화 앙데팡당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앙데팡당전,
부산청년비엔날레, 국제 우편미술제 등 일련의 현대미술 기획전에 초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70년대 중반부터
국전을 비롯하여 중앙미술대전, 경남미술대전 등 각종 공모전에 꾸준히 출품하여 특선(중앙미술대전, 1979년)과
대상(경남미술대전 1982년)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하였다. 이러한 각종 공모전의 수상은 그의 회화적 역량을
객관적으로 입증해 주는 척도가 아닐수 없다.
심수구의 작품세계를 특정짖는 개념은 평면과 부피의 문제이다.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부터 관심을 기울여온 회화상의 화두였다. 즉, 본질적으로 이차원 평면에 입체를 표현할때 파생되는 문제가 환영(illusion)인
바, 모더니즘 회화의 핵심이랄 수 있는 이 이율배반적인 명제를 회화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점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방법적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게 된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이무렵에 벌써 그는 형태심리학의
실험을 도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형태심리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실험 가운데 하나인 도(figure)와 지(ground)의
문제를 일련의 판화와 회화작품으로 제시하였다.
흑백의 원통형이 교차되는 작품을
비롯하여 지그재그 형태의 흑백 도형을 나타낸 일련의 작품들이 그것이다. 그는 흑백의 원통형 작품을 20m x 2.5m
크기의 설치작품으로 출품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실험은 평면과 부피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느 직업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885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첫 개인전은 70년대 초반부터 이루어진 이 일련의 회화적 실험을 결산하는 자리였다.
여기에서 심수구는 지각에 관한 일려의 실험적 성과를 보여주게 된다.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룬
일련의 회하작품들을 통하여 그는 기하학적 작품에서 가장자리(edge)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필경 지각의
문제를 유발하는 명제였다. 즉, 흰색 바탕의 사각형 도형에서 검은 색으로 칠해진 가장자리와 검은 바탕에 횐색으로 칠해진
부분의 문제는 모두 평면의 자기 동일 증명과 관련된 개념으로 일루전과 실제 평면공간의 모순을 회화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드는 이문제를 채색의 영역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한다. 역시 같은 면적의 사각형을 이어 하나의
화면을 만들고, 각 사각형의 화지에 사선의 그라데이션(계조)을 부여하여 평면과 일루전의 문제를 문제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채도와 명도에 따라 화면이 굴곡진 것처럼 보이지만,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은 이차원 평면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 일련의
회하적 실험을 통해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이 주지적인 실험을 지속하는 가운데 그에게 찾아왔던 것은 아마도 표현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주지적인 실험에서 주정적인
경향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카롤린, 칼송, 부퍼탈 무용단의 공연에 심취하기 시작했던
그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현란한 춤사위를 통해 4차원 공간에서의 신체 표현에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무용수들의 신체의 공단점유와 이동의 문제를 이차원 평면에 적용시킬 때 어떻게 이를 표현할 것인가 하는 점에 착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의 상자들이 서성거리듯 한다. 상자의 면들은 존재하면서도 채색의 흐름이 그 벽을 무시하고 만다. 무대 위의 춤꾼처럼 탄력성과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오늘은 형과 색채를 모두 사랑해야지.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역시 선명한 형의 노래일 뿐이다." (작업노트)
여전히 형태에 관심을 두면서도 색채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그의 이러한 마음의 피력은 조형 표현에 대한 자유를 구가하겠다는 새로운 의욕으로 읽혀진다. 오랜 연조를 지닌 그의 <춤(Dance)> 연작은 펴현의 자유에 대한 그의 선언이다. 무미건조한 형의 논리에서 벗어나 분방한 표현의 자유에의 의욕이 이 연작들 속에 한껏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울트라마린을 비롯한 한색조 바탕에 약간의 난색을 대비시킨 <춤> 연작은 상자의 윤곽선을 지워나가는 가운데 상자의 형태를 해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화면의 질서를 창출하는 방법론을 지닌 작품들이다. 표현력은 형식과 규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써 자유를 얻게 된다. 그의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대략 20여 년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발하자면 그는 모더니즘 회화의 본질을 기나긴 회화적 체득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연대를 거슬러올라가 보자, 심수구는 1972에서 5년에 이르는 시기에 일련의 추상화를 시도한 적이 있다.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마치 번데기나 혹은 조약돌을 연상시키는 추상화들이다.
<작품(Work)1972년 작>은 작가의 언양 시절에 그린 작품인데,
통도사 근처의 시냇가에서 봤던 맑은 물 속의 조약돌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을 그렸던 때의 서울 화단은
현대미술 운동이 마악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며, 흑백단색화와 입체, 설치작업. 그리고 개념미술이 서서히 번져가던 무렵이었다.
타원형을 기본으로 삼아 화면을 이러한 단위들의 집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그의 관점은 같은 시기에 제작했던 일련의
지그재그식 기하학적 스타일의 작품들로 연결되지만, 단위의 직저으로 파악하는 그의 관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90년대
중반의 나무작업에 들어와서이다. 그는 긴 우회로를 거쳐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나무 이체작업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회화 평면을 하나의 오브제로 파악하고자 하는 그의 시각이 등장하게 된 것은 1993년의 목호화랑 개인전에서였다.
20년이 넘게 지속되던 <춤> 작업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평면에 철사나 판재와 같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첨가되는 입체작품 시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90년대 중반의 <춤> 연작은 도상학적인 면에서 볼때,
70년대의 지그재그형 기하학적 추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오려낸 이미지 및 헝겊의 꼴라쥬와
면 위에 가한 직선의 선묘가 중심을 이룬다. 이들 일려의 선묘 작품들은 <나무이야기>의 기초가 되는것이다.
1997년에 들어서 심수구는 캔버스의 뒷면과 앞면에 약 3센티 정도의 사이를 두고 철사로 구획을 하여 한지를 붙이는
작업을 시도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먹으로 채색된 한지를 칼로 잘라 다양한 한지의 반응을 보여주게 된다. 철사로
구획된 기하학적 화면의 단면에 일정한 크기로 잘린 나뭇가지들이 촘촘히 박히는 작업이 나타나는 시기는 2001년
이지만, 그 이전, 그러니까 1998년 이미 나뭇가지들이 화면에 병치되어 나타나고 있다.
심수구의 작업에서 나뭇가지가 등장하는 논리적 배경은 나무판자, 실, 철사, 등에 의한 캔버스의 분할이 새로운 작업
컨셉으로 등장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화면 구획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는데, 임의로 설정된 화면 구획에 표현성이
짙은 현란한 색점형태의 자유 추상을 결합하는 가운데, 이러한 일련의 시도를 하게 된다. 즉, 엄격한 기본 형태에
부드러운 내용을 결합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2001년 무렵에 제작한 나무작업들은 본격적인 나무 설치작업의 맹아에 해당한다. 그리고 비록 재료는 색체에서 나무라는
오브제로 전환되었지만 화면의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었다. 캔버스의 외각에 못을 치고 실이나
철사를 얽어 수많은 삼각형이나 다각형을 만든 다음, 그 사이릐 여기 저기에 나뭇가지르 채워 넣은 방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다. 그에게 있어서 나무는 이제 가장 큰 조형적 재료이자 대화의 상대가 된것이다.
"언덕위에서 내려다 보기도 하고 숲을 가로질러 걸어가기도 했다.
그 곳에서 만나는 풀, 나무, 돌, 흙, 그리고 언덕의 모습은 그렇게 넓은 곳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내 것처럼 다가왔다..........공기도, 호흡도, 나무도, 돌도, 흙도, 모두 내것으로
자연스레 그곳에 그렇게 놓여 있었다."(작업노트)
"나무가 내 것처럼 다가왔다"는 것은 강한 감정이입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거니와, 어째든 그에게
있어 나무는 주된 재료이자 표현도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나무에 대한 깊은 관찰과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무를 배어서 운반하는 일, 일정한 크기로 자르는일, 나무의 끝부분을 일일이 촛불로 태우는 일 등등은
어지간 한 끈기가 없으면 지속될수 없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직하게도 엄청난 이 일을 혼자서 해낸다. 남에게
시켰을 때 나타나는 섬세한 숨결의 손실을 안타깝게 여기기 때문이다.
나무작업은 이미 70년대 초반에 일련의 회화작품을 통해 나타났던 것처럼 단위의 집적에 대한 탐구이다. 그것은 또한
텅 빔과 꽉 채움에 대한 대조법이기도 하다. "70년대, 작업초기부터 품었던 부피에 대한 실천으로서 실제의
오브제를 사용하고 잇을 뿐, 회화상으로 나타난 것과 개념적으로는 동일하다. 단 차이가 있다면 회화 상으로는 이러한
용적이나 부피의 문제가 시각적으로 밖에 표현될 수 없지만, 입체에서는 촉각을 통해서 확인된다는 점이다. 만지거나
냄세를 맡을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럼으로써 사물의 존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실존을
있는 그대로 느낀다는 말이 아닌가. 그의 작품이 지닌장점은 자연을, 자연의 싱르러운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그는 가상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재의 문턱 으로 한걸음 다가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가상에서 출발하여
긴 우회로를 거쳐 드디어 실재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닌가.
도상들이 생나무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조형은 여전히 그의 작업의 포인트가 되고 있다. 그의 '채움'의
작업은 철거히 감각에 의해 이루어지며 어느 정도는 계산 하에 형성된다. 일정한 길이로 잘려진 나뭇가지를 손에 쥘 때의
그 살아있는 감각, 나무와의 대화, 신중함과 망설임, 구 서아애 본자눈 성념들 등등은 작품의 근저들이다. 작가는 어떤
면에서 나타난 결과 보다도 작업 할 때의 생기나 희열을 더 즐기는 자이다. 그것은 살아있음, 죽 실존에 대한 확인이다.
재료와 자아가 만나고,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비전을 열어 가는 자가 바로 작가인 것이다.
이번 전시회의 압권은 단연 11.3m x 28.5m의 대작이다. 일정한 크기로 잘려진 나뭇가지들로 가득 채워진 대형
패널 여러개를 결합하여 전시장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이 작품은 수개월에 걸쳐 제작한 땀의 결정이다. 바닥의 패널
한쪽에서 시작하여 벽의 패널에 이르는 검은 부분은 나무의 끝을 일일이 촛불로 태운 것이다. 다년 간에 걸쳐서 부피와
집적의 문제에 대한 고심해온 그는 이를 나무작업을 통해 입증하고자 했던것이다.
심수구는 근작을 통해 논리나 이론보다는 일종의 유우머적 요소, 키치적 요소, 표현적 요소를 보여준다. 서툴게 그린
꽃, 나비, 지점토로 만든 기성의 작품들, 어린이의 머리 장식용 꽃 등등 기성의 사물을 도입하는 방식 등이 도입되고
있다. 또한 나무의 단면에 가한 원색의 채색을 통해 표현적인 요소를 가미한 작품도 눈에 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작품이 지닌 본래의 개념에 어느 정도 두움이 되는 지는 알 수 없되, 예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는 그의 태도가 느껴진다.
한 겨울 시골의 처마 밑에서 흔히 보는 장작더미에서 착안한 심수구의 나무 작업은 스펙타클하게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게
될 것이다. 현대 미술이, 특히 설치작업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스펙타클한 방향으로 전개돼 가는 현 시점에서 그의 작업이
장차 어떤 방향으로 전환을 이루어갈지 주목해 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