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뭍도 아닌 흔히 갈대숲으로 뒤덮힌 습지는 온갖 생명체들의 보금자리이자 탄생의 요람이어서 생태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필자는 심수구의 《풍경》을 습지 혹은 습지의 갈대숲과 유비적으로 생각해 보고는 한다.
마치 습지가 그 습지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드러내지 않듯이 심수구의 《풍경》역시 그 “풍경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한적한 늦가을의 어느 황혼녘 우리가 갈대숲을 즐기듯 낭만적 풍경처럼 감상하여도 무방하지만 갈대숲의 늪을 탐색하듯 풍경의 비밀을 캐보는 해석학적 수고도 좋을 것이다.

풍경을 단순히 시각대상으로만 본다면 이는 마치 쓸모만 보고 습지를 생산지로 바꾸는 우리들의 우(愚)와 충분히 비유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갈대숲은 단지 낭만적인 공간일 뿐 이지만 갈대밭 습지는 수 만년 동안 습지를 살다간 생명체들이 그 생의 흔적을 퇴적시킨 결과, 생성된 터라는 점에서 고고학적 시간성을 지니는 것처럼 그의 《풍경》역시 한편으로는 심수구의 삶과 사유의 기록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미술로 통칭되는 주류미술에 대한 대응문화(count-culture)로서의 만만찮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울산의 한 과수원집 아들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한 그에게 과수목 들은 적어도 유년기를 보내는 동안 그의 가장 친숙한 벗이자 놀이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존 버거에 의하면 사물을 본다는 행위는 언어보다 선행한다.
어린이는 말할 수 있기 전에 사물을 보며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무들은 그가 사물과 만난 최초의 지각 즉 순수지각 대상이었으리라.
이런 유년기의 기억은 훗날 그의 회화적 표상과정에서 어떤 양태로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본다. 필자는 심수구의 《풍경》혹은 풍경을 이루는 매체인 나무나 그 가지에 관한 가능한 이야기들을 먼저 순수지각과 패턴 개념을 통하여 소묘하고자 한다.

과수원의 나무가지는 이른 봄철을 맞으면 둘로 분류된다.
하나는 그 해 열매를 맺을 가지와 다른 하나는 지난해 웃자라 잘려질 도장지이다.
즉 과수목은 필요한 가지와 불필요한 가지로 정확히 구분되는데 이때 쓸모없는 도장지가 잘려나간 나목의 과수목을 사각형으로 프레임화하면 그 기본구조가 몬드리앙 작품의 구성적인 이미지와 유사하다.

이와 같은 과수목에 대한 심수구의 생애최초의 ‘이미지기억(image-souvenir)’이 1970~80년대의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구성주의적 표상(도1)은 물론이고 ‘풍경’으로 통칭할 수 있는 1990년대 중반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나뭇가지들의 집합적 오브제 작품에 지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수원 나무와 그의 구성주의적 추상작품, 그 추상작품과 집합적 오브제 혹은 과수원의 나무와 집합적 오브제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들을 그가 언급한 바는 없다.
그러나 베르그송에 의하면 실제로 일상에서 거의 작동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잠재성 상태로 보존되던 ‘순수지각’은 ‘이미지기억’과 연합하여 현실적 지각표상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고 한다.
우리가 이에 수긍할 수 있다면 근작《풍경》의 방법론적 시발점이 된 나뭇가지의 집합작업을 이같은 맥락에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수구의 순수지각 대상으로 상정되는 과수목 들을 작품의 변화양태와 자의적인 관계로 묶어 이때 나타나는 패턴을 분석하여 본다.
1970~80년대, 그의 초기 작업에서의 과수목과 구성주의적 표상작업(관계1), 그리고 후기 작업인 《풍경》에서의 나무가지들과 그 풍경을 이루는 탈구성적인 집합작업(관계2) 을 보면 이 두 관계들은 비록 양상는 다르지만 포괄적 의미에서 서로 상응하는 패턴을 드러낸다.

이 관계를 이번에는 수직방향의 관계 즉 과수목-나무가지들(관계3)과 구성-탈구성(관계4)으로 돌려놓아도 상응패턴은 역시 드러난다.
물론 이 같은 분석도구로서의 패턴은 시각으로 분명하게 잡히거나 부분들의 집합이 만들어 내는 가시적 무늬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관계’를 말한다.
심수구의 초기와 근래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상응패턴들을 근거로 해서 유추할 때 심수구의《풍경》은 이미지 형태로 보존된 유년기의 과수원의 기억에서 형성된 잠재적 이미지지가 1990년대의 미술계의 다원적 상황과 조우하면서 그 다면적 생태를 반영하는 패턴적 사고의 표상물이라고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생명체는 삶의 패턴을 지니고 살아간다.
하등동물일수록 패턴에의 순응도는 높지만 패턴운용의 범위가 제한적인데 비하여 인간은 패턴의 운용범위는 넓지만 역으로 패턴에의 생존의 순응도가 떨어진다.
생명체는 패턴이 교란되거나 파괴되면 자기동일성을 잃게 되어 결국 죽음을 맞는다.
예술에서의 창조행위란 패턴의 운용범위을 극단적으로 자유변경하는 일이겠지만 그만큼 생존의 순응도는 더 위협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좋은 예술이란 패턴과 탈-패턴의 경계 지대 즉 생멸의 기로에서 예정에 없이 창발(emerging)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패턴은 잡을 수 있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방법’에 가깝거나 주변세계로서의 컨텍스트와 생명체의 텍스트 사이에 생긴 긴장의 형태이거나 거기서 살아남은 자연스러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심수구는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살면서 예술형식과 내용에서 굴절과 변화를 격고 있지만 그만의 예술행위(conduct)의 패턴을 일관되게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또 이점은 새로이 도래할 시행착오의 예술도박에서도 당당히 생존할 수 있다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유년기의 체험에서 보면 과수목의 도장지들은 일상에서의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그 존재가치는 잡다(雜多)거나 여백(margins), 일테면 타자들(the others)일 뿐이다. 그러나 그 타자들이 모여서 내는 하모니는 매혹적이다.

《풍경》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나뭇가지들이 밀식된 집합물이다.

나뭇가지 하나하나는 각기의 다른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이 집합적 형태로 나타나게 되면서 가지들의 정보량은 점차 적어져 아예 휘발되고 대신 인상이나 느낌이 증폭되어 마침내 어떤 뉘앙스를 지닌 이미지로 정착된다.
그것이 우리를 심수구의 《풍경》에 친숙하게 다가서게 하는 소이연이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근대는 기본적으로 이미지로 세상을 정복한 과정이었다고 설파한 적이 있다.

그의 풍경들이 때론 일루젼적 이미지를 지니기도 하지만 그의 조형은 재현(representation)보다는 제시(presentation)의 형식에 의존한다.
예술적 재현(표상) 행위는 일반적으로 높은 예술적 이미지(the high imagery)를 통하여 규범적인 것(the canonical) 즉 예술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제시(비표상) 행위는 낮은 이미지(the low imagery)를 통하여 규범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이미지세계로 나아가는데 이때 표상보다 이미지를 앞세우는 작품은 삶 자체에 더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선다.
그런 점에서 재현행위와 달리 제시행위는 항상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서성거린다고 할 수 있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in-between)에서는 당연히 예술작품의 내면인 ‘의미(sense)’보다는 예술작품의 표면(surface)을 이루는 '감각의 관능성(the erotic of sensation)'이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풍경》어딘가에서 숨어 숨 쉬고 있는 그 뾰족한 가지들(margins)들이 감각적이지 않은가?

또한 그의 풍경들이 비록 모더니스트 회화의 관행을 쫓아 올-오버 구조와 유사-평면적 구조를 지니고는 있지만 뾰족한 잔가지들을 시각적으로 대상화하기에는 부적절한 경험으로 부터 《풍경》은 시각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촉각적(haptic)대상으로 전환된다.
그런 까닭에 수용자(beholder)는 생명 에너지가 예술 에너지로 치환된 나무가지들의 정염을 ‘눈으로 화면을 쓰다듬으면서’ 감상해야 한다.

 

《풍경》은 그 규모가 위압적으로 크고, 입체화된 작품구조로 상당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이루 셀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나뭇가지의 집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풍경의 장관은 일별할 때 그 외형만으로도 숭고(sublime) 개념과 맞닿는다.
이 같은 숭고개념은 18세기 말의 칸트에서 그 핵심을 찾을 수 있다.
자연현상, 예컨대 폭풍이나 거대 기암절벽을 만났을 때의 공포감을 칸트는 ‘숭고’라고 말한다.
즉 숭고란 단적으로 큰 자연현상에 대한 이념에 맞는 이미지가 수용자에게서 만들어 지지 않을 때 생기는 감탄이다.
물론 리오타르가 그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주장하는 숭고 개념은 조금 다른 위상이다. 예술작품에서 숭고감의 기초가 되는 감탄은 그 크기나 수에서 근원하기보다 수용자의 주관적 경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풍경》은 예술적 규범을 넘어 나뭇가지를 반복적으로 집적시킨 재귀성(self-referentiality)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재귀적 작업에서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반복(repetition) 행위는 그 자체로 결여(lack)를 함축하므로 그 결여가 《풍경》의 재귀성(self-referentiality)과 맞물리면서 규범적 해석이 불가능한 상황은 가중된다.
그곳이 풍경과 숭고감이 맺어지는 지점일 것이다.
후기주의자 질 들뢰즈는 재귀적인 세계에서의 (예술가의) 정신과 같은 특이성은 그 어떤 유사성이나 등가성의 영역에 속할 수 없다고 한 바가 있다.
특이성(singularity)은 예술가의 작업과정에 내속되어 있던 어떤 잠재성이 돌출되어 만들어 내는 우발적 선물(emergency)이다.
그런 까닭에 들뢰즈는 재귀성과 반복을 우연이나 찰나의 존재론이며 동시에 예술적 리얼리티의 보고로 보는 것이다.
재귀적이라는 것과 반복한다는 것을 들뢰즈는 “등가물을 가질 수 없는 특이한 것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태도”라고 정의하면서 그것은 곧 “근대의 동일성(oneness)의 논리에 대한 탈근대의 다(多)의 공존의 원리”이라고 기술한다.
때문에 수용자들은 한편으로는 풍경들이 뿜어내는 매혹에 이끌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끝내 자신의 사유의 틀이나 경험의 한계에서 탈구되어 있는 《풍경》에서 의미가 산종(dissemination)하는 이중구조의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풍경》이 숭고한 감정을 야기 시킨다면 이는 그 작품의 크기나 나뭇가지의 엄청난 수보다는 오히려 의미의 산종 체험으로부터 작동될 것으로 본다. 1960년대의 모더니즘 회화의 격자(grid)와 앤디워홀의 작업도 같은 예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거대 규모가 만드는 《풍경》은 ‘숭고’보다는 ‘장관’이라는 의미에서 최근 미디어 환경과 관련하여 부상하는 파노라마(panorama) 개념과 연관될 것이다.
파노라마는 영화기술용어로서 예술의 개념어가 된 것은 1990년대 미디어아트를 위시한 가상예술(virtual art form)이 보편화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파노라마와 유사한 개념은 일찍이 전후의 미국을 중심으로 추상표현주의 미술이 부상하면서, '규모'나 '충격'과 같은 직접성을 추구하면서부터 회화에 도입된다.

이번에 발표되는 심수구의 작품 중에는《책-풍경》이 규모는 물론이고 그 책-풍경이 지닌 병풍구조부터 보다 파노라마에 근접한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업이 의도하는 바는 다르더라도 전시장의 한 벽면을 싸리나무가지로 가득 채운 심수구의 인사가나아트센터에서의 전시(2002)에서 파노라마 개념이 그 전시의 중요한 모티브였던 것도 자명하다.
이 같은 파노라마는 영상미디어에 대한 ‘몰입(immersion)’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올리버 그라우Oliva Grau)에 의하면 몰입은 가상실재가 일상화되면서 나타나는 현대인들이 영상에 관계하는 특성이다.
그라우는 몰입을 수용자가 미디어 영상파노라마에 침윤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하나의 정신상태에서 다른 정신상태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수용자의 체험에서 볼 때 몰입은 이미지 앞에서 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적 거리가 줄어드는 대신 이미지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한 감정개입이 증가하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파노라마에의 ‘몰입(immersion)’은 사각의 틀과 평면성을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하는 모더니즘 회화에서의, 수용자의 관조적 몰입(absorption)과 반대의 성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촉각성과 의미의 산종을 경험하게 하는 《책-풍경》에서 수용자는 가상실재의 영상작업은 아니지만 병풍의 구조를 닮은 책의 파노라마적 풍경으로부터 일종의 몰입(immersion)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인 퇴행(degression)은 조직화되어 분화한 행동이나 표현이 미성숙한 발달단계로 되돌아가는 일이나 유아적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말한다.

오늘날은 언어행위에서 인간의 직감과 느낌을 표현하는 기능이 더욱 희박해져 언어가 소통의 도구라기보다는 급기야 위세와 시늉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 일상화된다.
시각언어이던 문자언어이던 간에 언어는 선천적으로 구유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시대의 가치와 이념은 곧바로 언어의 표상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오늘날 언어에서 표상성이 주목을 받을수록 그 횡포와 병폐는 어느 때 보다 실로 크다.
이런 반성으로 부터 후기현대예술은 1970년대 초의 개념미술을 전환점으로 하여 직감과 느낌의 세계로 퇴행하게 된다.

퇴행은 몸-주체의 욕망을 단지 표면(surface)의 매혹적 표정으로 드러낼 뿐이다.
다시 말해 퇴행하는 작품들은 의미나 개념과 같이 명사적이지 못한 만큼 비-결정 사태(the non-determinated)로 인하여 기껏 동사적이거나 부사적 양태로 ‘잔혹극’처럼 부유하게 될 것이다.
심수구의 작품에서 “OOO처럼”으로 명명된 《풍경》이전의 명제는 이런 증후를 대변한다.
그런 점에서 심수구의 1970~80년대의 ‘명사(noun)'형의 초기작품이 일종의 ‘표의문자(ideograph)’라면 그 어른스러운 문자가 점차 《풍경》으로 퇴행되는 동안 어린이와 같은 천진스런 ‘표정문자(expressive phase)’로 변환된다.
이런 ‘표정’은 앞서《책-풍경》에서 이전의 작품들 보다 더 잘 구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책-풍경》이 드러내는 이런 표정은 필경 “책으로 이루어진 담론”의 퇴조에 대한 메타포일 것이다.

《책-풍경》에서 보다 적극적인 표정을 드러내는 나뭇가지들에 대하여 덧붙이자.
나뭇가지로 이룬 심수구의 작업은 도시적이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이를 지방적(regional/marginal)이라고 하자.
주지하는 대로 탈-식민주의가 대두되고부터 변두리 즉 지방적인 것은 촌스러운 것이 아니라 에너지가 소진되어 텅 빈 중심을 채우는 대안관계(counter-relationship)에서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심수구의 독창성은 그의 삶의 현장에 지천으로 널린 버려지는 과수목의 도장지나 싸리나무가지를 부끄럼 없이 회화적 매체로 전환한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최근 마치 인간이란 관점으로 여성이 다시 태어나고 늪이 생태(ecology)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방적인 것과 세련된 것, 하찮은 것과 중요한 것 혹은 비-예술과 예술, 동양과 서양 사이의 그 기하학적 거리(geometrical distance)를 위상학적 국면(topological phase)으로 전환시키는 풍경이다.

삶처럼 예술의 양태도 존재론적이기 보다는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생태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 전시에서 더 호평을 받는 이유도 그의 작품이 현금의 미술생태계의 상황을 이처럼 유비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퇴행의 국면으로 그의 작품에 곧잘 나타나는 감상성(sentimentality)이 있다.
우리가 심수구의 작품 앞에서 감상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장작을 처마 끝에 가득 쌓아두었던 우리들의 옛 추억이나 나뭇가지로 놀이하던 유년기의 기억 또는 나뭇가지가 지닌 자연스럽게 퇴락하는 색깔이나 그의 풍경 어딘가에 숨어있는 ‘뱀’ 같은 형상들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덧없는 반복적인 ‘쌓기 행위’가 마치 한 인생과 어딘지 유사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의 작품 앞에서 더 감상적이 된다.
감상성은 심수구의 《풍경》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보너스이다.
센티멘탈이란 용어는 원래 “느낌으로 가득 찬” 어떤 사물의 상태를 의미했고 예술작품을 센티멘탈하다고 기술하는 것은 작품이 느낌만의 반응을 야기시키는 경향이 농후하다는 뜻에서 모더니즘 기간 동안은 부적절한 함의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어린이가 순수하기도 하고 화도 잘 내듯이 감상성 역시 예술에 대하여 양면적이다.
문화평론가 뉴먼(Ira Neumann)은 감상성이 작품자체에 대한 고의적 오독에 근거한 반응이며 자기기만 행위라 하더라도 그 반응이 잘못되거나 못마땅한 것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고 한다.
뉴만이 주장하는 것은 감상적 반응의 특성인 이상화와 자기기만은 때로는 수용자의 심리치료에 수행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상화와 자기기만이 없으면 경험의 어떤 양상도 만족스러울 수 없기에 작품과 세상에 대하여 센티멘탈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비인간화과정이 가속화되는 세계에서 그 속도를 저지 시킬 수 있는 처방이라고 말한다.
세상을 이상화하고 우리자신을 속이는 것이 때로는 세상에 의하여 파괴되어 반응할 수 없는 세상보다는 나을 수 있을 것이다.
감상성은 예술자체의 입장에서는 항상 못마땅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뉴먼이 옳다면 감상성은 수용자의 반응에 주어진 최고의 모드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의 명제를 음미한다.

《풍경》의 영어 명제는 “wind-scape"이다.

landscape 즉 땅의 경치가 슬그머니 ‘바람의 경치, 즉 風景으로 넘어간다.
그의 《風景》은 나뭇가지로 구성된 추상적인 ‘공간(space)’이기보다는 무성한 잎새를 뽐냈을 ‘어떤 곳(place)’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또 그 무성한 잎새를 데려간 ‘바람’으로 시각예술에서 정작 ‘시각’을 거두고 대신 ‘맹목(blindness)’이나 ‘비가시적인 것(the invisible)’ 을 슬그머니 주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퇴행과 느림을 통하여 가벼움과 속도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명에 대한 저항이 《바람의 경치》의 비밀인지도 모른다.
그의 《풍경》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다가 저 멀리로 달아나는데 그 매력이 있다면 그의 매력은 우리의 기대를 살짝 저버리는데 있을 것이다..

사물을 비트는 그만의 메타-메타포적인 시선 때문이다.